2021. 11. 2 주님이 고난당한 성도의 증인이요 중보자이십니다 (욥 16:1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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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름다운교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05회 작성일 21-11-02 10:23본문
욥의 호소는 이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변한다.
욥은 몇 가지를 하나님께 절규하며 부르짖는다.
먼저는 자신의 무고한 핏소리를 들어달라는 절규이다.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16:18)
욥은 아벨의 무고한 핏소리를 기억하며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0)
아벨의 피는 무고한 자의 피이다.
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고함을 부르짖되 땅이 그 억울한 핏소리를 하나님께 대변해주길 간청하고 있다.
그토록 욥은 하나님 앞에서의 무죄함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극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호소하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욥의 참된 믿음이다.
두 번째 욥의 절규는 하나님이 자신의 무죄를 증언하실 증인과 중재자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6:19)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17:3)
욥은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면서도 진정한 증인이 되어주실 분, 하나님께 자신을 중재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증언과 중재를 요청할만큼 자신의 의를 확신할 수 있는 신앙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친구들의 충고처럼 적당히 자기 죄를 회개하는 듯하면서 은혜를 구한다면 친구들과 논쟁을 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억울해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만큼 욥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절대적 의에는 미칠 수 없어도 상황적 의는 주장할 수 있다.
욥처럼 하나님께 중재와 증언을 요청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길 다시금 결단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다음으로 욥이 절규하고 호소하는 것은 자신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친구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 (17:4-5)
욥은 친구들로부터 너무도 큰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그들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욥은 그들이 비난과 정죄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곤 한다.
형통함은 의로움, 고난은 불의의 결과라고 도식화 한다.
그래서 악인들이 자신의 형통을 근거로 의를 주장한다.
신앙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욥의 절규는 친구들이 자신들의 형통으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합리화하지 않도록 해주시길 부탁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상황들로 타인이나 내 자신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리고 상황에 안주하여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분별력을 위해 간구한다.
주님!
주님의 증언과 중재를 요청할 수 있는 영적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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