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5 회개 결단과 삶의 열매는 거듭난 증거입니다(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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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교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90회 작성일 22-03-08 12:03

본문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본문은 삭개오를 세리장, 부자라고 설명한다.

이 두 단어를 통해 삭개오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사람들에게 어떤 평판을 받고 있었을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 부자가 되고 세리장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수탈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입는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 가운데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은 '보고자 하되' '보기 위하여'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강한 의지이다.

곧 은혜의 갈망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받아주시고 용사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이런 종교지도자는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정죄하는 기성종교인들에게는 신물이 날 정도로 그들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시는 분 예수님은 정말 보고 싶었다.

그만큼 그 안에는 죄책감과 외로움,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보고자 함' 이 예수께 나가는 시작이다.

그는 보고 싶은 의지를 행동으로 옮겼다.

예수께서 지나가실 때 키가 작아 볼 수 없자 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삭개오를 불러 그 집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보고자 하는 자를 보아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5)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자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만나 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나 역시도 신앙의 모든 과정이 갈망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었다.

앞으로의 남은 삶도 주님을 갈망하는 삶, 은혜를 갈망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가 베푼 잔치에서 함께 식사하시며 진정 그를 친구 대하듯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하신다고 수군거렸고 삭개오는 이런 예수님께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은 단 한 마디도 삭개오의 죄를 지적하시지 않으셨음에도 삭개오는 스스로 자신 죄를 고하고 참회개의 결단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신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5-10)

 

한 죄인을 참 회개로 이끄는 것은 행위에 대한 정죄와 비판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수용함의 감동이다.

예수님도 삭개오의 죄를 모두 알고 계셨다.

또한 그가 사람들로 부터 얼마나 많은 정죄를 당해왔을지도 알고 계셨다.

사람들은 행위를 바꾸라 그러면 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존재를 먼저 수용하셨다.

그 수용함이 회개의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나 역시도 존재보다는 행위를 먼저 보고 판단했던 때가 많았다.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내와 자기부인이 필요하다.

그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다

이미 십자가를 생각하신 예수님은 존재의 수용을 십자가의 한 과정으로 여기셨을 것이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나의 삶이 존재를 수용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주시고 그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길 기도한다.

 

주님!

보고자 하는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보아 주시며 찾아와 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게 하옵소서.

행위를 판단하기 전에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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