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6 의로우신 주님을 정죄한 무책임한 결정 (마 27: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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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름다운교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22회 작성일 23-04-06 09:35본문
비겁한 선택을 하려던 빌라도의 알량한 양심은 군중들의 고함소리에 무너져 버린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인간이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가진 권세와 힘을 통해 정의를 행하려는 노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빌라도가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비겁한 선택을 함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이름으로 남게 된다.
예수님의 재판을 진행했던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한 종교지도자들의 죄목대로 예수님이 결코 역도가 될 수 없음을 발견했다.
또한 이는 예수를 종교적 죄목으로 죽이려는 것을 빌라도에게 반역죄목으로 고소하여 그의 손을 빌어 죽이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스스로를 변호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의 알량한 양심은 예수를 죽이지 않을 것을 요구했고 그는 그저 채찍질이나 해서 놓아 주려고 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지 사람들에게 예수가 인기있었음을 알고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해주는 관례를 따라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다.
또한 그의 아내조차도 예수께서 옳은 사람임을 주장하며 그를 풀어줄 것을 조언한다.
정말 예수께서 사형을 당할 죄목이 아니라면 그리고 양심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다면 그는 당시 유대의 최고 권력자로서 당당히 무죄를 선언하고 방면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비겁함으로 상황을 이용하려다 오히려 이용당하고 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매수당한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두려웠던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준다.
그는 비겁한 권력자였다.
그의 양심의 소리는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에 묻혀 버렸다.
물론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기에 어찌 하시든지 그 일이 성취되도록 하셨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비겁한 빌라도의 선택이 합리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비겁한 결정과 행위를 신의 뜻이라고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행하시든지 나는 내게 주신 신앙 양심과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한다.
많은 신앙인들이 상황에 쫓겨 비겁한 타협과 비양심적 결정들을 내리면서도 신의 뜻을 통해 합리화 하려는 어리석음을 접한다.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말씀과 신앙 양심을 따라 올바르게 행하는 성도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17-22)
종교지도자들은 군중들을 동원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요구한다.
이에 빌라도는 매우 당황한다.
십자가에 죽일 죄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왜 십자가에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는 신성 모독이다.
하나님을 모독한 자는 죽여서 나무에 매달라고 신명기에 말씀하고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을 세상에 알도록 하여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정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온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으셔서 나무에 달리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사도 바울은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예수님은 인류가 받을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지만 비겁한 빌라도는 자기 손을 씻고 모든 죄를 유대인들에게 돌린다.
그러나 그의 죄는 온 인류에게 대대로 전해져서 교회의 신앙고백마다 예수님을 죽인 자로 선언되는 것이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24-26)
주님!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시되 말씀과 신앙의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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