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5 정의를 외면한 사랑은 하나님 지혜가 아닙니다 (삼하 1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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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름다운교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37회 작성일 23-05-07 08:38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한 중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 공의의 실천을 통한 중재였다.
올바른 중재는 순수함과 지혜와 동시에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대신 받음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인류를 하나님께 중재하셨다.
압살롬을 다윗과 중재하려는 요압의 노력과 여인의 시도는 의미가 있으나 어느 누구도 공의의 희생을 언급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다.
압살롬이 형을 죽인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여인은 왕의 자비를 하나님의 사랑에 빗대어 칭송한다.
그리고 왕이 그 아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물론 압살롬과 다윗이 화해를 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죄를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공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도피 생활을 용납함으로 그의 죄를 묵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압과 여인의 중재는 매우 인본적이고 일시적이다.
다윗이 정말 압살롬을 용서하길 원한다면 그를 백성들 앞에 세우고 자신의 이름과 직위를 걸고 사죄의 은총을 구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의 심판을 아들에게 행하시고 우리를 사하심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공의의 심판 앞에 세워지지 않고 다윗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압살롬은 이후에도 회개함이 없이 살아가며 결국 왕권을 찬탈하여 역모까지 일으킨 것이다.
이런 중재의 결말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다윗의 비참한 도피와 압살롬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은 공의와 사랑이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할 성도들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고 희생적 중재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그런 중재였다.
오늘도 올바른 지혜로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이 종은 또,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임금님은 바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까,
저의 호소를 들으시고 선악을 가려내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이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늘 임금님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왕이 그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을, 내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말고 대답하여라. 그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이 물었다.
너에게 이 모든 일을 시킨 사람은 바로 요압이렷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임금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은 임금님의 신하 요압입니다.
그가 이 모든 말을 이 종의 입에 담아 주었습니다. 왕자님의 일을 잘 되게 하여 보려고,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이런 일을 꾸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슬기로우시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아실 줄 압니다. 그러자 왕이 직접 요압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시오,
내가 장군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가서, 그 어린 아이 압살롬을 데려오시오.(17-21/새번역)
주님!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하되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근거하게 하시고 희생의 십자가를 지게 하옵소서.
제게 올바른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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